중동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안보 위기가 구조화되는 가운데, 정부가 이번에는 외교와 수급 대책을 결합한 방식으로 대응에 나섰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카자흐스탄,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를 방문한 결과, 연말까지 원유 2억7300만 배럴과 나프타 최대 210만 톤을 추가 확보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기준으로 원유는 3개월 이상, 나프타는 약 1개월치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이번 순방의 핵심은 단순히 물량을 더 확보했다는 데 있지 않다. 정부는 이번에 확보한 원유와 나프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무관한 대체 공급선에서 도입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가 원유와 나프타 모두에서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높은 현실을 감안하면, 이번 성과는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동 긴장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공급선 자체를 우회하고 분산하는 방식으로 수급 불안을 낮추려 했다는 점에서다.
이번 순방의 중심은 사우디였다
이번 특사 순방에서 가장 결정적인 성과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왔다. 사우디는 한국의 제1 원유 수입국이자, 한국 입장에서 원유 수급 안정 대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국가다. 강 비서실장도 사우디를 제외한 채 원유 수급 안정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은 사실상 공허한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실제 성과도 가장 컸다. 사우디는 선적 여부가 불확실했던 약 5000만 배럴의 원유를 4월과 5월 중 홍해 인접 대체 항만 등을 통해 차질 없이 선적하기로 약속했다. 이어 6월부터 연말까지 총 2억 배럴의 원유를 한국 기업에 우선 배정하고 선적하기로 했다. 나프타도 정부가 요청한 50만 톤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물량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순방의 전체 원유 확보 물량 대부분이 사우디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사우디 방문은 이번 외교 일정의 실질적 승부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우디 성과의 의미는 물량 자체만이 아니다. 당장 4월과 5월 선적분 5000만 배럴을 홍해 인접 항만을 통해 돌려받기로 한 것은, 전쟁과 봉쇄 위험 속에서 기존 중동 항로 의존을 부분적으로 우회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에 연말까지 2억 배럴 우선 배정 약속까지 더해지면서, 정부는 최소한 올해 안의 급한 수급 불안은 한숨 돌릴 수 있는 발판을 확보했다.
카자흐스탄·오만이 넓힌 대체 공급선
카자흐스탄과 오만은 이번 순방에서 수입선 다변화의 실질적 축을 맡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원유 1800만 배럴을 확보했고, 이를 계기로 양국 간 고위급 직접 소통 채널도 새로 구축했다. 이는 단기 물량 확보를 넘어 향후 광물 자원, 도시 개발, 플랜트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교적 의미도 적지 않다.
오만에서는 연말까지 원유 약 500만 배럴과 나프타 최대 160만 톤 공급 약속을 받았다. 오만은 인도양에 접해 있어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위기 국면에서 전략적 가치가 커졌다. 특히 특사단은 오만 측에 호르무즈 해협 안쪽에 정박 중인 한국 국적 선박 26척의 안전 통과 협조도 요청했고, 오만 정부는 적극 협조 의사를 밝혔다. 공급선 확보와 해상 안전 협조를 함께 끌어낸 셈이다.
이들 두 나라는 사우디와 달리 규모 면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중요하다. 한국의 에너지 수급 구조가 특정 산유국과 특정 항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는 약점을 드러낸 상황에서, 카자흐스탄과 오만은 대체 가능성과 분산의 현실적 경로를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카타르, LNG 계약 재확인
카타르는 이번 순방에서 다른 세 나라와 결이 달랐다. 카타르 방문은 당초 일정에 없던 긴급 방문이었고, 논의의 핵심도 신규 원유나 나프타 확보가 아니라 기존 LNG 계약 이행 여부를 재확인하는 데 있었다. 다른 세 나라가 호르무즈 봉쇄와 무관한 대체 공급선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카타르는 오히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려야 실제 공급이 가능한 물량이라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특사단은 현지에서 휴전 합의 소식을 접한 뒤 카타르 방문을 추진했고, 타밈 국왕을 면담해 한국과 체결된 LNG 수출 계약이 적기에 이행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카타르 측은 한국과의 약속을 지키겠고 한국이 최우선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다만 이 대목은 신규 공급선 확보라기보다, 불가항력 선언 물량을 제외한 기존 계약분의 이행 의사를 재확인한 성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결국 카타르 방문의 의미는 사우디, 오만, 카자흐스탄처럼 대체 물량을 새로 확보했다는 데 있지 않다.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기존 계약의 이행 불확실성을 더 키우지 않고, 휴전 이후 재개될 공급을 한국 우선으로 묶어두는 데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AI와 산업 전반 투자 협력을 위한 실무 워킹그룹 구성까지 합의하면서, 에너지 협력과 산업 협력을 함께 연결하는 접점도 만들었다.
신뢰로 확보한 공급선, 남은 과제는 비축과 절감
이번 브리핑에서 반복된 표현은 결국 신뢰와 정성이었다. 강 비서실장은 방산 연계설에 대해 선을 그으며 가격은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대신 각국이 한국에 우선권을 준 이유로는 관계의 축적과 정부 차원의 직접적인 접근을 들었다. 오만은 정부가 직접 특사단을 보낸 점에 의미를 부여했고, 카자흐스탄은 향후 자원 개발과 도시 개발 협력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사우디는 최대 수입국과 주요 수출국이라는 상호 의존의 구조 속에서 한국을 우선 공급 대상으로 약속했다. 이번 성과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 경제 협력과 전략적 신뢰를 바탕으로 공급 우선순위를 다시 묶어낸 결과라는 뜻이다.
순방 기간 중 대통령의 이스라엘 관련 사회관계망서비스 글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지만, 강 비서실장은 방문국 가운데 이를 문제 삼은 나라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순방의 무게중심은 정치적 논란이 아니라 실제로 얼마의 물량을 언제 어떤 경로로 들여올 수 있느냐에 있었다.
다만 이번 성과가 곧바로 위기의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기관 차량 2부제, 공영주차장 5부제, 민간 자율 5부제 등 에너지 절약 대책은 당분간 계속 시행되고, 나프타 도입 단가 상승분 지원과 공동 비축 확대를 위한 저장시설 확충도 뒤따라야 한다. 사우디와 오만 등과 우회 송유관, 호르무즈 해협 외부 저장시설 구축까지 검토하겠다는 정부 설명은 이번 사태를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지정학적 위험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번 특사 외교는 사우디에서 대규모 원유 물량을 묶고, 카자흐스탄과 오만으로 대체 공급선을 넓히고, 카타르에서 LNG 계약 이행의 불확실성을 낮추며 급한 불을 끈 대응이었다. 그러나 진짜 과제는 그 이후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외교적 신뢰에 기대 물량을 확보하는 단계를 넘어, 비축과 수요 절감, 공급선 분산을 상시 체계로 만들 수 있느냐가 이번 순방의 성패를 최종적으로 가를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