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 파산법원이 옥시콘틴(OxyContin) 제조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의 최신 파산 계획안을 사실상 승인하기로 하면서, 20여 년간 이어져 온 미국 옥시콘틴 책임공방이 중대 분기점을 맞고 있다. 색슬러(Sackler) 가문이 15년에 걸쳐 최대 70억달러를 부담하고 회사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신, 퍼듀 파마는 공익 목적 회사를 표방하는 크노아 파마(Knoa Pharma)로 전환해 향후 수익을 옥시콘틴 위기 대응에 쓰는 구조다.
이번 합의에는 옥시콘틴 유행으로 피해를 입은 수만 명의 개인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금을 지급하고, 주·지방정부에 대규모 재원을 배분해 중독 예방과 치료, 과다복용 사망 감소에 활용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서 1999년 이후 옥시콘틴 관련 사망자가 90만명을 넘는 가운데, 이번 합의는 퍼듀 파마를 둘러싼 법적 책임의 -마지막 정산-에 가까운 조치로 평가된다.
대법원 제동 이후 손질된 70억달러 합의 구조
이번 계획안은 지난해 미 연방대법원이 기각한 이전 합의를 대체하는 수정안이다. 당시 대법원은, 옥시콘틴 사태에 대한 광범위한 민사 면책을 색슬러 일가에 부여하는 방식이 파산법 체계상 허용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새 합의안은 이 점을 보완해, 합의에 참여하지 않는 주체들이 색슬러 일가를 상대로 별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색슬러 가문의 상당한 자산이 역외 계좌와 신탁 형태로 운용되고 있어, 개별 민사소송만으로 실질적 회수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는 현실적 제약도 동시에 드러난다.
이번 안에 따라 색슬러 일가는 15년에 걸쳐 최대 70억달러를 현금으로 출연한다. 퍼듀 파마가 직면한 잠재적 청구액이 조 단위로 불어난 상황에서, 파산법원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리 가능한 규모를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상 최대급 옥시콘틴 파산, 정의와 효율 사이의 긴장
퍼듀 파마 파산 사건은 관련 법조인들은 미 역사상 가장 복잡한 파산 사건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로 복잡한 절차를 거쳤다. 회사는 약 6년 전, 주·지방정부, 원주민 부족, 개인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파산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퍼듀 측 변호인단과 피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이번 계획안 승인을 요청했다. 퍼듀 측 변호인은 이번 합의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방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과정은 정의 구현을 위한 응징과, 제한된 자원을 신속하게 배분해야 하는 파산 절차의 실무적 논리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소수의 반대 의견이 남아 있지만, 파산법원의 권한과 절차적 한계를 고려할 때 형사책임 판단이나 배분 구조의 근본적 재설계는 이번 계획안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소유권 포기와 공익회사 전환, 색슬러 일가의 산업 퇴출
이번 합의는 단순한 금전 배상에 그치지 않고, 회사 지배 구조와 색슬러 가문의 향후 행보에도 큰 변화를 요구한다. 우선 색슬러 일가는 퍼듀 파마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이들은 이미 2018년 이사회에서 물러났고, 배당 등 현금 지급도 중단된 상태다.
회사 이름은 크노아 파마(Knoa Pharma)로 변경되며, 새 경영진은 향후 이 회사가 창출하는 이익을 옥시콘틴 위기 대응에 투입해야 한다. 계획안이 차질 없이 이행될 경우, 이러한 구조 전환은 2026년 봄께 현실화될 전망이다.
색슬러 일가는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든 옥시콘틴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에 관여할 수 없게 된다. 자선 기부를 대가로 병원·대학 등 공공·문화기관이 색슬러 이름을 새로 붙이는 것도 금지된다. 이미 미국 내 여러 미술관과 대학에서 색슬러 이름이 제거된 가운데, 이번 합의는 이들의 제약 산업 및 공적 공간에서의 퇴출을 제도적으로 확정하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회사 관련 문서, 그 가운데 변호사-의뢰인 비밀 특권이 적용됐을 자료 상당 부분까지 공개하기로 하면서, 향후 옥시콘틴 사태의 경위와 책임 소재를 둘러싼 사회적 평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개인 피해자 직접 배상, 금액 규모와 증빙 장벽이라는 이중의 한계
이번 합의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주요 옥시콘틴 합의와 달리 퍼듀 제품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에게도 일정 금액의 배상금을 직접 지급하도록 한 점이다. 개인 피해자 배상 몫으로는 약 8억5천만달러가 책정됐다. 이 가운데 1억달러 이상은 태어날 때부터 옥시콘틴 금단 증상을 겪는 영아 지원에 별도로 사용된다.
개인 피해자에게 지급될 자금은 내년에 일괄 지급될 예정이다. 현재 약 13만9천명이 청구권을 보유한 상태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퍼듀 옥시콘틴 처방을 입증할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다. 증빙이 없으면 배상을 받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일부 피해자는 제도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변호인단은 전체 청구인의 약 절반이 요건을 충족한다고 가정할 때, 최소 6개월 이상 퍼듀 옥시콘틴를 처방받은 사람은 약 1만6천달러, 그보다 짧게 처방받은 사람은 약 8천달러를 지급받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변호사 비용 공제 전 기준으로, 실제 수령액은 이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광범위한 중독과 사망, 가족 붕괴를 초래한 사태의 규모를 감안하면 개인별 배상 수준이 낮다는 평가는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개인 피해자 그룹을 대리하는 변호인은, 색슬러 일가를 상대로 장기간 민사소송을 이어간다고 해서 더 큰 실질적 회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번 합의가 피해자 전체를 기준으로 할 때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재판부에 강조했다.
500억달러 이상 옥시콘틴 합의금, 사용의 투명성과 과제
퍼듀 파마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진행된 옥시콘틴 관련 소송의 일환이다. 주·지방정부는 퍼듀 외에도 다른 제약사, 의약품 도매상, 대형 약국 체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왔고, 주요 사건의 상당수는 이미 합의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확정된 합의액만 약 500억달러에 달하며, 큰 틀에서 이 자금은 옥시콘틴 위기 대응에 사용되는 것으로 돼 있다.
다만, 이번 합의에서도 합의금의 대부분은 주·지방정부 몫으로 배분돼 중독 예방, 치료, 회복 지원, 과다복용 사망 감소 사업 등에 투입되지만, 피해가 가장 컸던 당사자들이 이러한 자금 배분 논의에서 실질적 발언권을 갖기 어렵다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다.
최근 미국의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 수는 일부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옥시콘틴 합의금이 투입된 각종 사업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합의가 사회적 치유의 출발점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논쟁의 불씨가 될지는 향후 합의금 집행의 투명성과 결과 평가에 달려 있다.
한국에서의 함의와 과제
한국에서는 아직 미국과 같은 대규모 옥시콘틴 제약사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이나, 기업 파산을 동반한 책임 정산 사례는 없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중독·과다복용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느 시점에 어떤 법적 수단으로 제조사·유통사·유관 기관의 책임을 물을 것인지, 피해자 집단에 대한 배상과 공중보건 사업 재원 조달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논의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미국 사례처럼 사후적으로 막대한 합의금이 조성되더라도, 그 사용의 투명성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있는 중앙·지방정부의 가이드라인과 평가 시스템이 없다면, 재원은 생기고도 피해자 보호와 지역사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번 퍼듀 파마 합의는 한국 사회에도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의약품·의료행위로 인한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다룰 집단소송·징벌적 손해배상·공익신탁 등 법적 도구가 충분한지, 둘째, 공중보건 위기 대응 재원을 어떻게 투명하게 관리하고 시민에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미국식 옥시콘틴 위기가 그대로 재현되지 않더라도, 위험이 구조화되기 전에 제도적·정치적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의 파급력은 미국을 넘어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