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전 총리 별세…민주화운동가에서 ‘정권 설계자’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지난 25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민주평통에 따르면 그는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일정으로 22일 호찌민에 도착했으나, 다음 날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귀국 절차를 밟던 중 공항에서 호흡 곤란을 겪어 현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의료진은 심근경색으로 진단해 스텐트 시술을 시행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현지시간 25일 오후 2시 48분 운명했다. 민주평통은 유가족과 관계기관이 국내 운구와 장례 절차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향년은 73세로 전해졌다.

고인의 유해는 현지시간 26일 오후 11시 50분 호찌민을 출발하는 대한항공 KE476편으로 운구돼, 한국시간 27일 오전 6시 45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유가족이 관계기관과 절차를 협의하는 가운데, 행정안전부가 국가장 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장으로 결정될 경우 국무회의 의결 등 후속 절차가 뒤따를 수 있어, 긴급 국무회의가 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가장으로 확정되지 않으면 민주평통 기관장 형태로 치르는 방안이 논의될 전망이다. 현지 대응은 조정식 대통령 정무특보가 파견돼 지원·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거리에서 국회까지…민주화운동가에서 7선 중진으로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서울로 이주해 용산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한 뒤 사회학과로 재입학했고, 유신 체제 아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며 권위주의 국가에 맞섰다. 출소 뒤에는 번역과 출판 일을 거쳤고, 서울 신림동에서 사회과학서점 ‘광장’을 운영하며 민주화운동 인맥과 담론의 ‘현장’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권 진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던 평민당 시절이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당선되며 36세의 최연소 의원으로 국회에 들어왔다. 이후 한 차례 불출마를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7선 고지에 올랐다. 2016년 총선에선 당내 공천 과정에서 컷오프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됐고, “부당한 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직설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교육개혁에서 국정·선거 설계까지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내며 ‘교육개혁의 상징’으로 이름을 굳혔다. 입시와 학교 운영 전반을 손대며 제도 변화를 밀어붙였고, 그 파장은 세대의 기억에 각인됐다. 교육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논쟁도 뒤따랐지만,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추진하는 실행력은 그의 정치적 특징으로 남았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4~2006년 국무총리로 국정 한복판에 섰다. 대통령의 신임 속에 국정과제의 조정·추진에서 존재감을 보였고,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구상과 분권 어젠다를 둘러싼 ‘설계자’로 자주 소환된다. 세종 지역구를 맡아 의정 활동을 이어간 이력까지 겹치면서, ‘행정수도’라는 상징과 함께 남은 정치인으로 기록된다.

이해찬의 정치적 의미는 ‘말’보다 ‘구조’에 있었다. 그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기획을 담당해 승리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민주진영 내부에서는 전략가·조직가로 통했다. 2018~2020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당을 정비하며 선거 체제를 다듬었고, 2020년 총선 승리는 그의 리더십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거론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종종 ‘판을 짜는 사람’, 당의 방향을 정하고 길을 내는 ‘좌장’으로 함께 불렸다.


마지막 직함,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지난해 10월 이재명 대통령은 그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하며 “원숙한 자문으로 대북·통일 정책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밝혔다. 그는 2025년 11월 취임식에서 ‘포용과 통합’과 ‘국민 공감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2기 민주평통의 활동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일정도 민주평통 업무였다.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일정으로 2026년 1월 22일 베트남 호찌민에 도착해 현지 자문위원들과 교류·협의 일정을 소화하던 중, 다음 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던 길에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졌고, 심근경색 진단과 시술 뒤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내 별세했다. 출장지에서 마지막까지 ‘현장’과 ‘조직’을 챙기던 그의 방식이, 그렇게 생의 끝자락까지 이어졌다.


정치권 애도…여야 “민주주의 반세기 한 축”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여권을 중심으로 추모 메시지가 이어졌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비보에 가슴이 무너진다’며 고인의 민주주의 헌신을 기렸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도 “민주주의를 향한 평생의 여정”에 경의와 감사를 표했고, 조승래 사무총장과 한정애 정책위의장 등 당 지도부·중진 의원들도 잇따라 애도를 밝혔다. 현지에서 곁을 지킨 최민희 김현 의원 등은 ‘평생 민주화와 민주정부를 위해 헌신했다’는 취지의 글로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대통령실에서도 애도 메시지가 나왔다. 강훈식 비서실장은 고인이 “민주화와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라는 거대한 꿈”에 평생을 바쳤다고 회고하며, ‘정치는 사람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일’이라는 고인의 신념을 되새겼다. 고인의 위중한 상황이 알려졌을 때 이재명 대통령은 조정식 정무특보를 현지에 급파해 상황을 챙긴 것으로 전해졌다.

야권에서도 ‘정치적 대립을 넘어선 평가’가 뒤따랐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고인이 민주주의 회복과 수호에 헌신했다며 “남긴 발자국을 기억하겠다”고 했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위중한 소식이 전해진 뒤 정치권은 ‘쾌유’를 기원하며 현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시작해 장관·총리·당대표를 두루 거친 그의 궤적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와 국정의 자리로 뿌리내려 온 시간과 겹쳐 있다. 상대를 설득하고 조직을 움직여 성과를 만들어내는 실행력, 그리고 “정치는 결국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믿음이 그의 정치에 남은 유산으로 꼽힌다. 많은 이들은 이해찬을 치열한 시대를 건너며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고, 다음 세대가 걸을 길을 닦아온 ‘일하는 정치인’으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