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한 출생시민권 제한 정책에 대해 일부 원고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는 요청에 대해 구두 변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책을 즉각 시행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은 기각되었다. 연방대법원은 오는 5월 15일 이 사안에 대한 본격적인 심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사건은 출생시민권 제도의 향후 존폐뿐만 아니라, 하급심 판결의 범위와 연방대법원의 관할권에 대한 해석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요청은 하급심의 전국적 가처분 명령 범위를 제한해달라는 절차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연방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인 심리를 열기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정치·법적으로 중대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특히 출생시민권을 제한하려는 정책 자체가 하급심에서 “명백히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상태에서, 연방대법원이 해당 정책에 대한 시행 여부를 심리하겠다고 한 것은 향후 미국 내 이민 정책의 방향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약 트럼프 측이 승소할 경우, 이 정책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대다수 시민에게도 적용되어 미국 전역 대부분에 시행될 수 있게 된다.
행정부의 전략과 절차적 쟁점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취임과 동시에 출생시민권 종료를 골자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해당 명령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불법 체류자이거나 외국 국적일 경우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치는 미국 헌법 해석의 근간을 이루는 수정헌법 제14조 제1절의 전통적 해석에 도전하는 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68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14조 제1절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다.”
이는 1898년의 연방대법원 판례인 US v. Wong Kim Ark 사건에서 결정된 바 있으며, 이후 100년 이상 동안 미국에서는 출생시 시민권 부여 원칙이 보편적 기준으로 자리잡아 왔다. 이 원칙은 단순히 이민자의 자녀에 대한 권리를 넘어, 미국 사회가 포용과 평등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관할권에 속한다’는 문구는 불법 체류자의 자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해당 조항의 해석을 변경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해석을 넘어, 미국 시민권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하급심의 반발과 전국적 가처분 명령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은 발표 직후부터 미국 내 여러 주 정부 및 이민자 권리 단체들의 즉각적인 법적 대응을 촉발했다. 이들은 해당 조치가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워싱턴,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등 주요 연방 지방법원은 모두 해당 정책에 대해 전국적 금지명령(injunction)을 발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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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존 커거나워(John Coughenour) 판사는 이 사건을 “내가 판사로 재직한 40년 동안 가장 명확한 위헌 사례”라고 지칭하며, 1월에는 일시 중지 명령을, 2월에는 영구적 금지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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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연방 판사는 이민자 권리 단체와 개인 원고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에 대해 전국적 효력을 지닌 금지명령을 발령했고, 제4순회 항소법원은 2:1로 이 결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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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추세츠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는 뉴저지를 포함한 18개 주가 제기한 집단 소송에서 세 번째 금지명령을 내리며, 사실상 해당 정책의 전국 시행을 봉쇄했다.
이들 판결은 모두 2025년 3월 13일,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연방대법원에 항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안의 헌법적 정당성과 전국적 효력의 타당성이 동시에 연방대법원의 심리에 오르게 되었다.
연방대법원의 핵심 쟁점: 전국적 금지명령의 타당성
이번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이 심리하게 될 핵심 쟁점은, 정책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기 이전에, 하급심이 발령한 전국적 금지명령의 적법성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쟁점을 넘어, 행정부의 정책이 소송 당사자가 아닌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CNN 에 따르면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인 스티브 블래딕(Steve Vladeck)은 “트럼프 행정부는 헌법적 판단을 회피하면서 절차적 쟁점을 통해 정책을 사실상 전국적으로 시행하려 하고 있다”며, “이는 향후 비슷한 방식으로 위헌 논란이 있는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연대법원이 이번 사건을 통해 전국적 금지명령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할 경우, 이는 연방 법원의 권한과 대통령의 행정력 사이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정헌법 제14조 해석을 둘러싼 논쟁
보수 진영은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관할권에 속하는’(subject to the jurisdiction) 문구를 좁게 해석하여,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의 자녀는 미국 헌법의 보호를 완전하게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진보 성향의 학자들과 다수의 판례는 이 문구가 단순히 외국 외교관이나 적국 병사와 같이 미국의 법적 관할을 전혀 받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를 지칭한다고 해석해왔다.
미 법무부는 이번 사건에서 “하급심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전국적 금지명령을 내리는 것은 법원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트럼프 행정부뿐만 아니라 이전 행정부들, 심지어 일부 대법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반대 측은 “이번처럼 정책 자체가 위헌 소지가 명백한 사안에서는, 전국적 효력의 금지명령이 아니면 주별로 서로 다른 시민권 기준이 생겨 법적 혼란과 혼선을 초래하게 된다”며, 금지명령의 범위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연대법원의 판결이 미칠 파장
이번 긴급 항소는 본안 판결은 아니지만, 향후 수개월 간의 정책 시행 여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다. 이는 2021년 텍사스주의 낙태 제한법을 둘러싼 사건과 유사하다. 당시 연대법원은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 법률에 대해 가처분 명령을 기각함으로써, 사실상 Roe v. Wade 판례의 효력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보수가 다수인 연방대법원은 해당 판례를 공식 폐기했다.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손을 들어줄 경우, 출생시민권이라는 미국 헌법의 핵심 가치가 뒤흔들릴 수 있으며, 각 주의 출생자에 대한 시민권 부여 여부가 지역별로 달라지는 전례 없는 법적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미국 내 이민자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큰 파장을 미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헌법 해석과 연방-주 간 권한 분배 문제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미국 시민권의 정의, 연방 법원의 권한, 대통령의 행정력, 그리고 헌법 해석의 방향을 좌우할 중대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한국의 헌법과 국적법 비교
대한민국 헌법과 국적법은 출생에 의한 시민권 부여에 있어 미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을 따른다.
먼저, 대한민국 헌법 제2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이 조항은 시민권(국민 자격)을 헌법이 직접 규정하지 않고, 입법기관이 제정하는 법률에 위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헌법과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이 헌법 제14조를 통해 출생지 기준의 시민권을 헌법적으로 보장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헌법이 시민권의 자격 요건을 ‘법률의 영역’에 맡기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출생만으로 시민권이 자동 부여되지 않으며, 국적 취득 여부는 행정적 심사와 입법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국민’의 의미를 법률에 전적으로 위임한 구조가 입법 권력에 의해 정치적 환경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정 정권이나 여론이 국적법을 개정할 경우, 헌법적 기준 없이도 특정 집단이나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 자격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대한민국 국적법 제2조와 제3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국적법 제2조는 출생에 의한 국적 취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출생 당시에 부 또는 모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자는 대한민국에서 출생하였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한다."
또한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기아는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그 부모가 모두 외국인임이 명백하지 아니한 때에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추정한다."
제3조는 출생에 의한 예외적 국적 취득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정은 속인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일정한 상황에서는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속지주의 요소도 일부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법제도상의 구분을 넘어, 시민권과 국민됨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누구를 포함할 것인가에 대한 헌법적 철학의 차이를 반영한다. 즉, 미국은 시민권을 헌법에서 직접 보장하고 이를 보편적 권리로 간주하는 반면, 한국은 국민 자격을 입법에 위임함으로써 보다 폐쇄적이고 행정적인 통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향후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은 헌법 개정이나 국적법의 입법적 정비를 통해, 시민권 부여 기준의 명확성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