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10시25분경,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담화를 통해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계엄령이었다. 계엄군은 선거관리위원회와 일부 공공기관에 진입했고,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기 전까지 국회 출입 통제 시도가 이어졌다. 그날 밤과 이튿날 새벽 사이 국회는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했고, 12월 4일 새벽 4시 30분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가 선포되면서 6시간 남짓한 계엄의 밤은 형식상 막을 내렸다.
그러나 헌정 질서를 뒤흔든 비상계엄은 곧바로 형사 수사와 탄핵, 관련 법제 개정으로 이어졌다. 국방부·검찰·경찰·사법부 등 국가기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후 어떻게 책임을 묻고 스스로를 성찰했는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과제다. 진상 규명과 내란 단죄 역시 계엄 선포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사법부: 침묵의 밤에 대한 뼈아픈 자기비판
비상계엄 직후 사법부의 대응은 가장 큰 비판을 받았다. 대법원은 계엄 선포 당일 별도의 공식 입장을 내지 않은 채, 내부적으로는 계엄 상황에서 형사 재판 관할을 어떻게 할지 검토하는 회의를 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사법권 독립을 지키기보다 계엄사령부와의 관할 조정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바로 다음 날 부산지법 김도균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망에 글을 올려 대법원의 대응을 공개 비판했다. 그는 위헌·위법한 계엄 선포에 대해 대법원이 협조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계엄 후속 조치 논의에 참여함으로써 국민 기본권을 지키는 최후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렸다고 지적했다. 김 부장판사는 과거 유신체제와 군부독재 시기 법원이 정권 눈치를 보느라 헌법 질서를 지키지 못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며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는 취지의 통렬한 반성과 책임 추궁을 요구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계엄 해제 직후에야 뒤늦게 사법부는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법원 내부망에 게시했다. 그러나 이는 이미 계엄이 종료된 이후의 사후적 대응이었으며, 위기 상황에서 사법부가 선제적으로 헌정 질서를 방어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사법부 내부에서조차 계엄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즉각 대외적으로 천명했어야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사법부는 계엄 사태에서 두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하나는 계엄 선포 자체의 위헌성을 다투는 헌법적 판단을 신속히 제기하지 못했다는 절차적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법권 독립 침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계엄 체제와의 관계 설정에서 헌법 수호보다 관할 조정에 무게를 둔 태도다. 이는 향후 비상 상황에서 대법원·헌법재판소·각급 법원이 어떤 위기 매뉴얼과 커뮤니케이션 라인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제도 개선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검찰: 수사 대상이 된 통제 받지 않는 권력
비상계엄 사태에서 검찰은 수사기관이라기보다 잠재적 공범 내지 이해당사자로 지목되면서, 구조적인 신뢰 상실을 자초했다. 계엄 직후 경찰이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을 때, 검찰은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협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우정 검찰총장이 김용현 장관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 지휘부가 계엄 기획·집행 과정에 관여했을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결국 내란 혐의를 다루는 주된 형사 수사는 검찰이 아니라 국회가 추천한 특별검사에게 넘어갔다. 검찰 조직은 비상계엄 관련 수사에서 사실상 배제됐고, 특검은 계엄 선포·군과 경찰의 동원·야당 정치인 체포 시도 등 전체 사슬을 독자 조사했다. 이는 통제 받지 않는 검찰 권력이 헌정 위기 상황에서 민주적 통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향후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비상 상황에서의 역할을 어떻게 법률과 제도로 명확히 할 것인가가 별도의 정책 과제로 떠올랐다.
경찰: 지휘부가 피고인이 된 기관 내란
경찰 역시 계엄 사태의 한 축이었다. 국가수사본부와 경찰 지휘부는 계엄군과 함께 특정 정치인 체포 작전에 동원되거나, 국회 출입 통제 계획 수립에 관여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전 서울경찰청장 등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으며, 조 청장은 별도로 국회의 탄핵심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경찰청 자체는 계엄 직후 조직 전체가 수사 대상이 된 상황에서 초기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후 공수처와 국방부 조사본부, 특검이 참여하는 합동수사 체계가 가동됐지만, 지휘부 다수가 피고인 신분이 된 경찰이 민주적 통제와 조직 안정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는 점에서 제도적 트라우마가 적지 않다.
국방부와 군: 조직적 가담과 부분적 항명
비상계엄의 실질적 집행 주체는 군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점거, 국회 진입 시도, 주요 언론사와 공공기관에 대한 출동 명령 등 강압적 조치는 국방부와 계엄사령부 지휘 라인에서 내려졌다. 현직 합참의장은 2025년 국정감사에서 12월 3일 비상계엄을 두고 "불법 계엄을 사전 모의하고 적극 가담한 것은 명백한 내란 행위"라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일부 장성의 돌발 행동이 아니라 군 수뇌부가 참여한 조직적 내란 기도였음을 스스로 확인한 셈이다.
국방부 장관 김용현은 계엄 선포의 제안자이자 실행 총괄이었다. 그는 11월 말 북한 오물 풍선 사건을 계기로 합참 전투통제실을 찾아가 고강도 대응을 지시하는 등 군사적 긴장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고, 이를 계엄 준비의 일환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12월 3일 밤 10시 28분 비상계엄 선포 직후 곧바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 정진팔 합참차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모든 군사 활동은 장관이 책임진다"고 선언했으며, 계엄 해제 시까지 합참 지휘통제실에 상주하며 세부 작전까지 직접 관여했다. 국방부 장관이 단순한 정책 책임자를 넘어 내란 실행의 직접 지휘자로 기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합동참모본부와 육군본부 역시 구조적으로 계엄에 가담했다. 통상 계엄이 선포되면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는 것이 법과 관례지만, 이번에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지명되면서 합참의장 기능이 의도적으로 우회됐다. 합참은 장관 지시에 따라 별도의 법적 검증 없이 합동참모회의를 열고 계엄 포고와 출동 명령을 각 군에 하달했다. 육군본부는 계엄사령부 실무를 담당하면서 포고령 작성과 병력 동원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국회와 선관위 등 주요 기관을 겨냥한 점령 작전의 실행 창구가 됐다. 계엄 포고령 1호에 국회의 정치 활동을 사실상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된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다.
국군방첩사령부의 역할은 보다 은밀했다. 방첩사 예하 HID 부대는 계엄 수개월 전부터 서울 투입을 전제로 선발·훈련을 받았고, 계엄 직전 수도권 인근에 집결해 대기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계엄 선포 직후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로 출동하라는 구두 명령을 수차례 내리고, 야당 정치인과 여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체포·신병 인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명령이 모호하고 법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일부 지휘관들은 법무실과 협의 끝에 위법성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선관위 출동을 사실상 거부하고 사복·비무장 상태로만 인원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명령 이행을 최소화했다.
육군 특수전사령부와 해병대 등 일부 전투부대는 계엄 포고령과 별도 지시에 따라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 등은 법정에서 대통령과 군 수뇌부로부터 국회의사당 출입문을 강제로 파손하고 의원들을 연행하라는 취지의 압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는 국회에 대한 물리력 행사가 단순한 경비 조치가 아니라 입법부 기능을 무력화하기 위한 계획된 작전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처럼 군 명령 체계는 상명하복 구조를 전제로 설계돼 있어, 일선 지휘관이 위법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일부 수뇌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체포됐을 것"이라고 진술하며 자신들의 가담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부사관·병사 일부는 내란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명령을 지연·축소하거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과 김현태 전 특임단장 등은 계엄의 위법성을 인정하며 공익제보자로 나서는 절차를 밟고 있다. 이들의 선택은 내란 실행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군 동원의 속도와 범위를 제한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국방부는 2025년 7월 계엄 당시 상부의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에 응하지 않은 군인들을 찾아 포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군이 위법 명령 거부 원칙을 조직 차원에서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한 조치라는 점에서 민주적 군 문화를 재정립하려는 신호로 평가된다. 동시에 군 수뇌부 상당수가 내란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향후 인사·교육·작전계획 수립 과정에서 헌정 질서 수호와 문민통제를 최상위 가치로 명문화하는 제도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준다.
헌법재판소와 국회: 헌법 수호 장치
입법부와 헌법재판소는 계엄 사태 초기 몇 시간 안에 비교적 헌법이 예정한 역할을 신속하게 수행해 사태를 수습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며, 동시에 계엄 선포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사전적 통제 장치는 부족했다는 비판도 병존한다.
국회는 계엄 선포 약 2시간 30분 뒤인 12월 4일 새벽 1시경,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의도 일대와 국회 앞에는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경찰·계엄군의 봉쇄선에 맞서거나 이를 우회해 의원들의 동선을 보호하며 이른바 ‘국회 방어전’을 전개했고, 야당 의원과 보좌진이 본회의장에 진입해 표결에 참여할 수 있는 물리적 통로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같은 달 14일,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며 정치적 책임 추궁 절차를 본격화했다.
탄핵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탄핵 소추를 인용해 윤 대통령을 파면했다. 결정문은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과 계엄법이 정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고, 국회와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행위가 권력분립과 선거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계엄 선포를 이유로 파면된 첫 사례로, 헌법기관이 결국 헌정 질서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국회는 또한 2025년 7월 계엄법을 개정해, 계엄 하에서도 군이 국회 출입을 통제하거나 회의를 방해하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계엄이 선포되더라도 입법부 기능은 중단할 수 없다는 점을 법률 차원에서 재확인한 것이다.
다만 계엄 선포 자체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구조적·제도적 장치는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헌법기관들이 평시에 어떤 예방적 통제 시스템과 위기 대응 매뉴얼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형사재판: 내란 우두머리와 공모자들에 대한 법원의 시간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사건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재판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 중이다. 첫째는 12월 3일 비상계엄과 관련된 내란 우두머리 혐의 사건이다. 윤 전 대통령은 2025년 1월 26일 내란죄 우두머리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에서 30회가 넘는 공판을 거쳤다.
재판부는 2025년 11월 공판에서 늦어도 2026년 1월 초에는 변론을 종결하고 판결 선고를 해야 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통상 결심 공판 후 한 달 안팎에 선고가 내려지는 관행을 감안하면 1심 선고 시점은 2026년 2월경으로 전망된다. 윤 전 대통령의 현 구속기간 만료일은 2026년 1월 18일로, 법원과 특검은 구속 만료 이전에 선고를 내릴 것인지, 별도의 추가 구속영장을 통해 수사를 이어갈 것인지라는 시간적 압박 속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둘째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사건이다. 이 재판은 2025년 9월 시작돼 10여 차례 공판이 열렸고, 경호처를 동원한 체포영장 집행 방해와 비상계엄 관련 국무위원 의결권 침해 의혹 등을 다루고 있다. 두 재판 모두에서 윤 전 대통령의 출석 태도, 증인과의 공방, 방어 전략이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법리적으로 어떻게 평가될지가 핵심 쟁점이다.
국무위원 및 군·경 수뇌부 재판
국무위원들에 대한 재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내란 우두머리 방조 혐의로 기소돼, 내란 관련 피고인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결심 공판을 마쳤다. 내란특검은 2025년 11월 26일 한 전 총리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2026년 1월 중 1심 선고를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 등으로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선관위 무력 점거·언론사 단전·단수 지시 등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조지호 경찰청장 등 군·경 수뇌부 역시 내란중요임무종사·일반이적 등 혐의로 기소돼 여러 사건에서 병합 심리가 진행 중이다.
조지호 청장에 대해서는 별도의 탄핵심판도 진행돼 변론이 종결된 상태이며, 연내 또는 단기간 내 선고가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탄핵 결정 결과에 따라 경찰 조직의 정치적 중립성과 지휘 책임에 대한 기준이 새롭게 정립될 가능성이 크다.
정책적 평가: 부분 작동한 헌정 수호 장치와 남은 과제
12월 3일 비상계엄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가 축적해 온 제도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디서 멈춰 서는지를 동시에 보여줬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계엄 선포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진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와 국회 주변에서 전개된 시민들의 ‘국회 방어전’,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계엄법 개정, 특검에 의한 독립적 수사, 위법 명령 거부 군인에 대한 국방부 포상 등은 헌정 질서를 빠르게 수습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제도적 대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위기의 순간 시민과 입법부·일부 군·경 구성원은 실질적으로 계엄의 확대를 저지했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헌법기관들이 대통령의 권한 남용에 대해 최종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태는 몇 가지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첫째, 사법부와 검찰이 위기 초기에 권력 감시자 대신 관망자 혹은 이해당사자로 비쳤다는 점이다. 이는 긴급 상황에서 사법권 독립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검찰 권력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논의를 요구한다.
둘째, 군과 경찰 지휘부가 정권의 정치적 이해와 헌법 질서 사이에서 어느 쪽에 충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인사 시스템이 충분히 정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 지휘관과 실무자들이 위법 명령을 거부한 것은 개인의 양심과 용기에 기댄 측면이 컸으며, 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는 아직 미흡하다.
셋째, 비상계엄과 같은 초헌법적 상황에 대비한 위기 매뉴얼이 국가기관별로 파편화돼 있거나 실질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다. 대법원, 헌법재판소, 국회가 공동으로 공유하는 헌정 질서 수호 매뉴얼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맺음말: 1심 판결을 넘어 계엄 리스크의 제도적 봉합으로
2026년 상반기 중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주요 공범들에 대한 1심 판결이 잇따라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판결은 개별 피고인의 형사 책임을 확정하는 의미뿐 아니라, 권력분립과 문민통제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정치·헌법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형사 재판과 탄핵, 법 개정만으로 12월 3일 비상계엄이 드러낸 제도 리스크가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국가기관이 누구에게, 어떤 절차를 통해 책임을 지는지, 시민이 어떤 방식으로 감시와 저항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계엄의 밤을 기억하는 이유는 과거를 응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다시 비슷한 유혹과 오판이 반복될 때, 이번에는 법과 제도가 한발 앞서 헌정 질서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2월 3일 비상계엄 1년을 맞는 지금, 각 국가기관이 내놓은 반성이 일회성 사과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구조 개혁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앞으로 몇 년간의 입법·사법·행정 선택에 달려 있다.
동시에 1주기를 맞은 지금, 민주주의의 완성은 권력자나 국가기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일상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책임을 나눌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지고 있다. 계엄의 밤을 밀어낸 국회 방어전과 이후 이어진 각종 공론장과 시민 행동이 보여주었듯, 앞으로도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한 시민들의 조직화·감시·참여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이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뒷받침할 것인지—예컨대 긴급 상황에서의 시민 참여 절차, 정보 공개와 기록 보존, 공익제보자 보호와 지원, 민주주의 교육과 시민사회 인프라 강화 등—를 둘러싼 정책적 고민이 함께 심화될 때, 12월 3일의 상처는 비로소 민주적 학습과 제도적 진전의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