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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본 기사는 작품 주요 전개와 결말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당신이 죽였다’는 두 가지 형태의 가정폭력에 노출된 두 여성, 은수와 희수가 폭력의 반복을 끊기 위해 ‘시신 없는 범죄’를 설계하고 도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스릴러다. 어린 시절 폭력적 아버지 아래에서 트라우마를 지닌 은수와 남편 진표의 통제와 폭력에 갇힌 희수의 연대가 서사의 축을 이루고, 은수가 희수의 집에서 폭력을 목격한 뒤 자신의 과거 악몽이 재현되는 현실을 멈추기 위해 ‘함께 남편을 없애자’는 급진적 제안을 내놓으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공모’의 국면에 진입한다. 희수 역시 반복되는 폭력의 종식을 위해 이 계획에 동의한다.
생존, 연대, 그리고 윤리의 회색지대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죽거나 죽이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약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통로가 얼마나 협소한지 보여준다. 두 여성의 연대는 폭력의 사슬을 끊기 위한 생존 전략이자, 동시에 법과 도덕의 경계에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 전반은 가정폭력 현실과 이를 둘러싼 제도적 무방비 상태, 법적 사각지대와 취약점을 드러내며, 폭력에서의 탈출이 왜 개인의 비밀스런 공모와 도피로 귀결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현행 법·제도의 빈틈과 취약점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사회·구조적 쟁점: 왜 ‘범죄의 설계’가 유일한 탈출로 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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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사법 절차의 문턱: 상습·위험성 평가는 형식에 그치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만 과도하게 요구되는 관행이 남아 있다. 공동거주 공간 특성상 현장 훼손·목격자 부재로 물적 증거 확보가 어렵고, 디지털 폭력(메신저 협박·위치추적·계정 탈취 등)은 포렌식 없이는 입증이 난망하다. 초기 출동에서도 ‘가정사’ 프레임과 즉각 격리 회피 관행이 맞물리면 개입이 지연되고, 접근금지 위반의 실시간 확인·강제력도 약해 사실상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전가된다. 수사 단계에선 상호폭행 프레임·쌍방 고소 유도가 빈발해 사건이 축소·분쟁화되고, 합의·반의사불벌 유인이 강해 기소 자체가 좌초되기 쉽다. 법원 단계에서도 초범·생계·화해 등을 이유로 가벼운 처분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남아 있어 억지력이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제도는 ‘증거의 공백’과 ‘개입 지연’이 결합되면서 가정폭력범에게 유리한 경로를 제공하고, 피해자는 반복 위험 속에서 스스로 탈출을 설계하도록 내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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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종속과 돌봄의 덫: 경력 단절과 생활비 통제는 탈출 비용(주거 이전비·보증금·변호사 선임비·치료·돌봄 비용 등)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해자가 급여·계좌·공동인증서·카드 사용을 통제할수록 신용도 하락과 채무 누적이 뒤따르며, '탈출-생계-채무'의 악순환이 고착된다. 아이가 있을수록 주거 이전, 양육·교육 공백 대응, 법률 절차 동행 등 '이사·법률·생계·돌봄'의 복합 부담이 동시에 발생해 의사결정 창구가 좁아진다. 야간·응급 돌봄 인프라가 부족하면 신고 직후에도 일·수입 복귀가 지연되고, 결국 폭력의 현장으로 되돌리려는 경제·시간 압력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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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통제·스토킹: 위치추적 앱·원격제어/스파이앱 설치, 계정·비밀번호 강요, 메신저·통화·클라우드 백업 감시, GPS 소형 추적기나 차량·가전 IoT 기기를 통한 이동 경로 파악 등 기술적 수단이 가정폭력의 연장선으로 쓰인다. 피해자는 휴대폰·노트북·가정용 카메라·스마트홈 계정까지 생활 인프라 전반이 장악되면서 탈출 계획이 노출되고 사회적 관계가 차단된다. 그럼에도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구식·비표준화된 대응 프로토콜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부서 간 책임 전가와 승인 대기만 길어지고, 그 사이 초기 대응의 골든타임이 반복적으로 증발한다. 프로토콜 업데이트 주기와 교육·점검이 느슨해 지역·기관별 편차도 커진다.
이러한 빈틈들이 맞물리면, 피해자는 신고 이후에도 실질적 보호를 체감하지 못한 채 ‘증거의 공백—개입 지연—경제·사회적 압력’의 악순환 속에서 다시 위험으로 밀려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은 스릴러의 장르적 긴장을 넘어, 왜 국가의 보호 체계가 개인의 비밀스런 공모와 도피로 대체되는지 묻는다.
결론: 스릴러가 던진 사회에 대한 질문
두 여성의 공모는 개인 일탈의 서사가 아니라, 보호 체계 부재와 공권력의 지연·단절이 만든 구조적 비상구의 은유다.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피해자가 스스로 법의 그늘을 우회해 ‘생존 설계’를 해야만 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정책의 목표는 피해자에게 ‘범죄의 설계’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신고와 동시에 위험평가, 임시격리, 접근금지·전자경보, 임시 주거·생활비, 법률구조·포렌식 지원이 하나의 표준 절차로 자동 기동돼야 한다. 디지털 통제 차단, 24시간 지역 통합센터 연계까지 ‘신고-보호-주거-소득-법률-돌봄’의 사슬을 끊김 없이 잇는 설계가 핵심이다. 나아가 예산,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한 집행 로드맵을 마련해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 신고 순간부터 안전·주거·소득·법률이 자동 연동되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거버넌스를 함께 세우는 것, 이것이 작품이 남긴 가장 현실적이고 시급한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