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주가 공화당의 연방하원 다수당 유지를 위해 밀어붙인 선거구 재획정에 대해 연방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연방 항소법원 3인 판사 중 2대 1 결정으로 텍사스의 새 하원 선거구 획정은 흑인·히스패닉 유권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인종적 게리맨더링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며,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해당 획정안의 사용을 금지하는 가처분을 인용했다.
판결을 작성한 제프리 V. 브라운 연방지방법원 판사(트럼프 1기 때 지명)는 “텍사스의 선거구 재획정은 정치적 고려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으며 지역구를 인종적으로 게리맨더링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존재한다”고 적시했다. 이 결정으로 텍사스는 최소한 2026년 중간선거에서는 공화당 주도 의회가 2021년에 작성했던 기존 선거구를 사용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텍사스 주정부와 공화당 지도부는 곧바로 연방대법원에 항소했다. 이번 사건은 2026년 연방하원 선거의 판세뿐 아니라, 인종·정당을 둘러싼 미국 선거구 재획정 법리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국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판결 핵심: “정당 이익”을 넘어선 인종 기반 선거구 조작
‘정당 게리맨더링’과 ‘인종 게리맨더링’의 경계
텍사스 공화당은 선거구 획정은 공화당 의석을 최대 5석까지 추가 확보하기 위한 정당 전략일 뿐 인종 차별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해 왔다. 연방대법원은 2019년 판례에서 순수한 의미의 정당 게리맨더링은 연방법원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바 있어, 공화당은 이 판례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연방 항소법원은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문은 텍사스 의회 획정 과정에서 흑인·히스패닉 유권자가 다수 또는 연합 다수를 이루던 선거구를 체계적으로 재조정하고, 이들 유권자 비중을 낮추거나 서로 다른 소수인종 커뮤니티를 분리 배치하며, 반대로 공화당 성향 백인 유권자가 다수인 지역을 새로 엮어 공화당 안전구를 늘리려 한 정황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다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패턴은 단순한 정당 전략을 넘어, “인종을 주요 기준으로 선거구 경계를 설계한 것”으로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새 선거구들은 텍사스의 연방하원 38개 선거구 가운데 소수인종(흑인·히스패닉)이 투표 연령 인구의 과반을 이루는 선거구 수를 16개에서 14개로 줄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소수인종연합 선거구의 대폭 축소다. 기존 구역에서 소수인종 유권자가 함께 연합해 백인 유권자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9개 선거구 가운데 4개로 축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 현역 의원 6명 중 5명이 다른 현역과 같은 선거구에 편입됐는데, 이들 대부분이 흑인 또는 히스패닉 의원이었다.
미국 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등 민권단체는 “텍사스의 의도는 흑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 수를 줄이는 데 있다”며, 이는 그 자체로 헌법상 금지되는 인종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전국적 ‘선거구 획정 전쟁’ 속 텍사스 판결의 정치적 의미
2026년 하원 선거 구도에 미칠 영향- 공화·민주, 서로 다른 방식의 ‘의석 극대화’
텍사스 사안은 현재 진행 중인 전국적 선거구 전쟁의 한 축이다. 공화당은 텍사스뿐 아니라 미주리·노스캐롤라이나 등에서 새 지도를 통해 각각 1석씩 추가 공화당 의석을 노리고 있다. 반대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주민발의안를 통해 민주당에 유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새 선거구가 확정되어, 민주당이 최대 5석을 더 확보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됐다.
현재 텍사스의 연방하원 의석은 공화당 25석, 민주당 13석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의석 중 2석은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공화당이 꾸준히 ‘탈환 1순위’로 노려온 곳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새 지도는 트럼프가 10%포인트 이상 격차로 이기는 선거구를 30개로 늘리는 구조였다. 현실 정치로 환산하면, 공화당이 최소 30석 이상을 확보할 수 있는, 사실상 ‘초 안전지대’를 설계한 셈이다. 이는 트럼프와 공화당 지도부가 2026년 선거에서 현재의 근소한 하원 다수 의석을 방어하고, 나아가 우위를 확대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었다.
즉 양당 모두 각 주의 제도와 절차를 최대한 활용해 의석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법원이 새 선거구 획정을 막음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2021년 획정된 기존의 선거구로 치르는 기본 시나리오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단 시점과 내용에 따라 텍사스 의석 구도뿐 아니라, 전체 하원 다수당 향방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
소수인종 대표성·투표권 법리의 시험대
‘형식적 다수 선거구’ vs. ‘실질적 대표성’
텍사스 공화당은 새 지도가 오히려 소수인종 대표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연합 선거구’ 5개를 없애는 대신, 히스패닉 다수 선거구 1개와 흑인 다수 선거구 2개를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민권단체와 민주당 측 변호인단은 이를 ‘허울뿐인 선거구’라고 본다. 새로 만든 선거구들의 인종 구성은 과반이라고는 하지만 그 격차가 매우 미미해, 실제 투표에서는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백인 유권자가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통계상의 ‘다수’일 뿐 현실 정치에서 소수인종이 선호 후보를 선출할 실질적 능력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판결문이 “소수인종 유권자가 향후 최소 2년간, 헌법 위반 소지가 큰 인종 분류를 전제로 한 선거구에서 대표를 뽑아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가처분을 인용한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
전망: 2026년까지 이어질 ‘지도 정치’와 정책적 함의
이번 텍사스 판결은 단기적으로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안겼다. 공화당은 새 지도를 통해 텍사스에서만 하원 의석을 최대 5석까지 늘리고, 미주리·노스캐롤라이나, 캘리포니아에서의 소송을 통해 전국적인 하원 지형을 재편하려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번 사건은 정당 전략과 인종 차별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당이 의석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정치의 상수에 가깝지만, 그 과정에서 인종을 ‘도구 변수’로 사용하는 순간 헌법 위반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법원이 분명히 환기했기 때문이다. 연방 사법부는 앞으로 어디까지를 정당한 정치 전략으로 인정하고,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위헌적 인종 차별로 간주할 것인지 기준을 보다 정교하게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향후 연방대법원이 텍사스 사건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선거구 재획정은 형식적 인구 기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 대표성·투표권 보호를 중심 가치로 재정렬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정당 전략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텍사스의 이번 판결은 2026년 선거를 넘어 미국 정치에서 ‘선거구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경계선’을 다시 긋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한국에서도 진행 중인 선거구 획정·입법 논의
텍사스 사례는 미국만의 특수한 논쟁이 아니다. 한국 역시 인구 편차와 대표성 문제를 둘러싸고 선거구 조정 논의가 진행 중이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10월 23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전북특별자치도의회의원 지역선거구가 인구 편차 상하 50% 기준을 위반해 주민의 평등권과 선거권을 침해했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6년 2월 19일까지 입법을 마치라고 시한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25년 11월 26일 전체 위원회의를 거쳐, 2026년 6월 치러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앞서 시·도의회의원 선거구 획정을 위한 관련 법안 논의를 조속히 추진해 달라고 국회와 원내정당에 공식 건의했다. 중앙선관위는 입법이 지연될 경우 지방의원 선거구가 ‘공백 상태’에 놓여 예비후보자의 선거운동 자유와 유권자의 충분한 정보 획득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공직선거법에 규정된 지방의원 정수와 선거구 획정 논의를 함께 진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미국의 인종·정당을 둘러싼 게리맨더링 논쟁과 달리 한국의 현 쟁점은 인구 편차와 선거구 공백 방지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표의 등가성’과 대표성 확보를 위해 헌법재판소와 선거관리위원회, 입법부가 어떻게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가라는 점에서 양국이 공통된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한국 내 체류·정주 외국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지금까지는 선거에서 거의 고려되지 않았던 ‘인종·다문화’ 요인이 향후 정치 과정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아직 외국인의 선거권 부여 범위는 제한적이지만, 특정 지역에서 외국인·이주민 커뮤니티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집적될 경우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이들의 대표성과 사회적 통합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미리 정교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선거구 입법 논의는 장기적인 인구 구조 변화와 다문화 사회 전환에 대한 ‘선행적 고민’의 출발점이 될 필요가 있다.



